조현화랑은 2024년 12월 19일부터 2025년 2월 16일까지 권대섭 작가의 개인전 <돌아오는 Reduction>과 황지해 작가의 개인전 <물이 오를 때 When the water rises>를 개최한다. 전시장 1층과 2층에서 각각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흙과 자연을 매개로 생명력과 본질을 탐구하는 두 작가의 고유한 작업 세계를 조명한다. 1층 전시장에서는 정원 디자이너 황지해 작가의 정원 작품이 설치된다. 어둑한 공간 속 설치된 노루망과 박주가리가 자연의 섬세한 형상을 담아내는 한편, 흙 냄새 가득한 ‘흙방’은 생명력의 원시성을 서사적으로 풀어내며 우리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2층 전시장에는 권대섭 작가의 도자 작품 30점이 벽오동나무 차탁 10점과 함께 전시된다. 현대적 조형미로 재해석된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달항아리는 흙과 불로 빚어진 단순한 형태 속 긴장감과 생명력을 담아낸다. 흙과 자연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각기 다른 현대적 조형 언어로 탐구하는 두 전시는 한국적 미감의 구체성과 확장성을 보여주며 전시장 전체에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룬다.
박주가리와 달항아리에서 찾는 영원의 미술
권대섭 작가의 개인전 <돌아오는Reduction>과 황지해 작가의 개인전 <물이 오를 때When the water rises>가 따로 또 함께 펼쳐질 이번 조현화랑의 전시는 생명력과 본질에 관한 이야기다. 흙에서 시작하고 비롯되는 백자와 정원은 마술사 같은 흙의 성질을 바탕 삼아 갤러리 안에서 새로운 환상의 지점을 확보하며 길게 뻗어 나간다. 달항아리와 정원은 오늘날 한국의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큰 구체성과 확장성을 보여준다. 염원이나 무심함 같은 추상적 언어들을 넘어 이제 사람들은 그 넉넉한 몸을 만들어내는 기술적 방법과 흙과 불, 그리고 한국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고유의 자생화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 구체적 관심과 이해는 자연스레 더 큰 세계를 열어 보이고 이는 한국 고유의 미감과 자연관에까지 힘있게 연결된다.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와 황지해 작가의 정원은 물론 각자의 ‘그림’이지만 하나의 큰 그림인 듯 유동적이고 조화로운 모습으로 한국적 미감의 고유함과 모던함을 생각하게 한다.
조현화랑의 전시는 환상을 중요한 얼개로 사용한다. 2021년 선보인 권대섭 작가의 개인전이 대표적이다. 달항아리 11점을 선보였던 전시에서 화랑 측은 반듯하고 긴 철판을 런웨이 삼아 톱 모델 같은 작품을 띄엄띄엄 올리고 그 위에 한지로 만든 커다란 사각 조명을 달아 우아하면서도 파격적인 무대를 펼쳐 보였다. 그 안에는 블랙홀 같은 고요함과 반짝이는 환상이 있었고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는 사람들의 뇌리에 더 깊이 각인되었다.
황지해 작가의 방 : 박주가리의 세상으로 보는 거대한 진실
이번 전시에서도 그 환상의 얼개는 중요한 짜임새로 들어간다. 1층 전시장에서 관객을 먼저 맞이 하는 것은 황지해 작가의 설치 작품들이다. 밤처럼 어둑한 공간. 천장과 바닥 곳곳을 기다란 노루 망이 가로지르고 그 안에는 민들레 홀씨처럼 허공에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번식을 하는 박주가리가 솜뭉치처럼 놓여 있다. 1W, 3000K 조명은 네트 위의 그 식물을 희미하게 비추고 박주가리의 홀씨와 가지는 벽면에 다양한 형체의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림자 속 철망의 세부 형태는 육각 형인데 이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식물의 세포와 비슷하다. 바늘처럼 얇은 박주가리 씨앗이 그물 망에 담기고, 바닥으로 떨어지며 번식을 위한 여행을 하고, 그렇게 생명의 순환이 일어나는 모습을 고요하게 보여주는 무대. 황지해 작가는 “씨앗이 움트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생태의 순환 속에서 모호하고 불안한 마음이 정돈되는 경험을 자주 했습니다. 식물의 그런 모습은 우리의 균열 안으로 들어가 살아갈 힘을 부여하지요. 현대인의 불안과 결핍, 빈약하고 위태로운 마음의 ‘선’을 비유하기 위해 찾아낸 것이 박주가리 씨앗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더해, 이번 전시가 “하늘과 땅 사이, 작고 여린 것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우리 모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공존 속에서 살아가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안다’라고 하는 것들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부터도 그렇게 살고 있고요. 머리카락보다 가는 박주가리 씨앗들이 땅속에 보이지 않는 형상을 어떻게 만들어 내고, 이른 아침 태양이 식물을 통해 어떤 말을 하며, 보이지 않는 미기후微氣候(지면에 접한 대기층의 기후)는 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견고하게 지켜내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현대미술로서의 정원을 정의하는 말은 그 자체로 철학이었다. “정원은 수많은 콘텐츠를 담아낼 수 있는, 스펙트럼이 무궁무진한 그릇이에요. 다양한 형식과 기법, 장르를 초월해 이용자와 상호작용 합니다. 끊임없이 형식과 역할을 확장해 나가고 질문합니다. 무엇보다 실질적인 접촉을 통해 능동적 감정과 지적인 반응, 다층적인 경험을 유도하고 다양한 분야의 불협화음을 흡수해 경계를 허물고 삶의 의미를 묻습니다. 관객은 자연의 실체에 개인적 경험을 더해 새로운 질문과 답을 얻지요. 정원이 현대미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갤러리로 들어온 정원을 만들며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장식성 보다는 자연의 본질이었다. 그 중에서도 원시성. “꽃과 식물은 그 자체로 장식적이지만 그 뒤에 있는 이야기는 너무 크고 장엄하기 때문에 장식만으로는 그 세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없어요. 카오스마저 거대한 질서 안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세계거든요. 한국은 국토의 70%가 산과 숲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 속에서 으름나무와 다래덩굴, 머루덩굴이 뒤엉켜 자라고 특정한 기후 환경을 필요로 하는 새박, 모데미풀, 히어리, 병꽃나무가 자라지요. 그런 ‘원시성’에서 한국 정원의 ‘모던’과 저력이 나온다고 봐요. 360도에 가까운 무한한 상상력도요.” 더 많은 꽃과 식물을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박주가리로만 연출한 것은 그 원시적 매력과 비밀을 클로즈업 하듯 촘촘하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주가리 그림자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동굴처럼 어둑한 ‘비밀의 방’이 나온다. 많은 전시에서 나름의 확실한 역할을 했던 이곳이 이번에는 ‘흙방’으로 변신했다. 바닥에 흙을 두툼하게 깔고 벤치 하나만 놓은 간결한 구성. 벤치에 앉아 있으면 어둑한 시야를 뚫고 흙 냄새가 콧속으로 흐르듯 들어온다. “시각적 요소를 배제하고 싶었어요. 요즘의 세상은 어느 때보다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무가치한 것들에 시선을 머물게 할 때도 많지요. 풍요가 낳은 빈곤이랄까요? 어쩌면 각자의 가치관 마저 피상적일 때가 많지요. 그런 것에서 탈피해 좀 더 본질적인 순간을 마주하게 하고 싶었어요. 후각은 감정이나 정서를 자극하잖아요. 아마 모두에게 자신만의 ‘흙방’이 있을텐데 제게 그곳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어머니의 텃밭이었어요. 주변의 산과 들, 시원한 바람과 비온 후의 흙 냄새, 무꽃과 도라지꽃, 더덕과 산국화가 제가 만난 첫 세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더덕은 어머니의 손가락 냄새를 떠올리게 해 특별히 좋아하지요. 신여성이었던 엄마는 시골 마을에 탁구대를 처음 설치하고 아이들에게 배드민턴도 가르쳤어요. 미적 감각도 뛰어나 산딸기를 주더라도 꼭 칡덩굴 잎사귀에다 올려 줬어요. 산딸기가 보석처럼 보였지요(웃음). 푸성귀를 가지고 오더라도 늘 색조합을 해서 주신 덕분에 색깔 공부가 따로 필요 없었어요. 어떤 럭셔리한 호텔의 세팅보다 훌륭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시골이었지만 그곳에서 보낸 유년기는 삶을 통틀어 제 영혼이 가장 맑고 아름다운 때였어요. 흙냄새와 더불어 그런 각자의 기억과 추억들이 함께 실려 오기를 바랐습니다.”
흙은 기장에서 가져온 사질 양토다. “모든 식물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식물에 생육 환경에 가장 적합한 재료입니다. 식물 생존에 필수 영양소가 되는 무기질이 많고 통기성도 좋은 비옥한 흙이지요. 기장에 많이 머물지는 못했지만 이른 아침 달음산을 산책하면서 소생태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쥐똥나무와 회잎나무가 연리지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모습을 보았고 비목나무 군락지도 보았지요. 아침에 고요히 올라오는 흙냄새와 나무 뿌리냄새가 특별히 좋았습니다. 전시장 안에 있는 흙이 우리의 마음에 미처 흐르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억눌리고 단절된 감정을 다시 흐르게 하고 내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 다시금 깨닫게 하기를 바랍니다.” 황지해 작가의 많은 말은 시 같은 구석이 있었다. 인터뷰 말미, 그녀가 “우리 삶이 힘든 건 ‘진실’에서 멀어졌기 때문이 아닐지요?”라고 물었다. ‘흙방’의 바람과 목적은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진실의 상기에 있는 것 같았다.
권대섭 작가의 방 : “달항아리의 핵심은 푸근한 곡선이 아닌 짱짱한 직선”
1층 황지해 작가의 전시장이 밤의 숲이라면 2층 권대섭 작가의 전시장은 밤의 다도해多島海 같다. 권대섭 작가가 집에서 쓰던 차탁을 원본 삼아 똑같은 차탁 10개를 추가로 제작하고 그 위에 저 마다 생김새가 다른 달항아리를 올렸다. 한 점은 비스듬히 뉘였는데 그런 선택이 저마다의 모양으로 군집을 이루는 다도해의 풍경을 한층 생생하게 만들어낸다. 저 멀리 해운대 앞바다가 보이는 안쪽 공간에는 벽면을 따라 달항아리와 주병, 그리고 사발 20여 점을 도열하듯 놓았다. 표면에 아무런 그림이 없는 민무늬도자는 한국에만 있는 형식인데 그 깨끗하고 과감한 선택은 얼마나 아득한 기운을 담고 있는지. 프랑스의 문명 비평가 기 소르망 Guy Sorman의 말마따나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가만 바라보게 된다.”
이번 전시의 관전 포인트이자 핵심은 심플하다. ‘권대섭표 달항아리는 무엇이 다른가? 40년 가까이 달항아리를 빚고 있는 그가 이 물질에 담고 싶은 궁극의 미학은 무엇인가?’ 이 답을 듣기 위해 전시 전, 권대섭 작가의 작업실로 향했고 이번 전시 작품들을 막 부산으로 실어 보낸 권대섭 작가는 한층 홀가분한 마음으로 물음에 답했다. 핵심은 우리가 백자와 달항아리에게 갖고 있는 감정과 선입견은 온전하지 않다는 것. “백자를 보면 푸근하다, 정겹다, 따스하다, 누이 같다라고 해요. 이론이나 미학, 사사로운 욕심을 내려놓고 경지에 이른 편안함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리 보지 않아요. 절대 편하지 않습니다. 긴장감이 넘치고 당당하고 웅장합니다. 힘과 생명력이 넘치는데 그러면서도 절제가 있어요. 굽과 몸통, 구연부의 비례가 조금만 안맞아도 얼빠진 사람처럼 맥이 탁 풀립니다. 그런데 잘 만든 백자는 안그래요. 비례며 높이며 총체적 기운이며 무지하게 예민합니다. 엄청나게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더 벌릴 수도 있고, 더 오므릴 수도 있는데 최대한 힘을 유지한 채로 만들다 긴장미가 최고점에 달했을 때 귀신 같이 손을 놓는 것. 대충 만들어서 나올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에요. 그런 건 어떤 경지로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지 문법과 공식으로는 설명이 안 돼요. 달항아리를 달항아리로 만드는 절대적 법 같은 게 있는데 그게 바로 내가 늘 생각하는 겁니다.” 권대섭 작가는 말을 길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긴 설명을 싫어하고 짧은 핵심어를 좋아한다. 이 말은 그가 단서처럼 던진 문장들을 길게 연결한 것이다.
달항아리를 달항아리로 만드는 절대적 법에 대한 답을 듣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 영업 비밀”이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대직약굴大直若屈, 대교약졸大巧若拙, 대변약눌大辯若訥이었다. 차례대로 풀이하자면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하고, 큰 기교는 서툰 듯 하고, 훌륭한 웅변은 눌변으로 보인다는 뜻. 노자의 <도덕경> 45장章에 나오는 말로 권대섭 작가는 특히 대직약굴에 방점을 찍었다. “항아리가 원형이라고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크게 보면 직선이에요. 원형으로만 보니 이쁘다, 푸근하다 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제가 추구하는 미감은 직선미입니다. 직선으로 만들어야 힘과 긴장감이 생깁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 원지방天圓地方과도 연결된 말이에요. 곡선만 있으면 ‘힘아리’가 없고 그런 물건은 오래 못 갑니다.”
확실한 말들이 계속 쏟아졌다. “이 비밀을 깨우친 사람들이 김환기와 윤형근, 박수근 화백이에요. 김환기 화백의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같은 그림을 보세요. 토기와 분청사기에 들어가는 인화 문이 그 안에 있습니다. 윤형근 작가의 그림은 철기둥 같이 묵직한 기운이 넘치고 박수근 작가의 그림에도 화강암의 힘이 담겨 있지요. 결국에는 힘인겁니다. 파워의 문제. 생명의 문제. 항아리가 원이라고 해서 둥글게만 만들면 그리 당당한 자태로 못 서 있습니다. 그 안에 심지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 생명력이 담겨요. 제가 만들고 싶은 달항아리는 그런 겁니다. 생명력과 예술혼이 넘치는.” 권대섭 작가는 소문난 옛 명품 수집가인데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 그 많은 물건의 공통점 역시 넘치는 생명력이다. 언뜻 보면 사람이 만들지 않고 신이 만든 것 같은. 그 세계는 당연히 추상인데 추상이므로 미궁 같고 미궁 같으므로 계속 매진할 수 있다. “달항아리를 만든지 40년 가까이 됐는데 여전히 재미있어요. 아직 만들고 싶은 작품을 못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을 거 예요.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작가는 흙과 유약이며 달항아리를 만드는 모든 요소에 계속해서 변화를 주면서 무지하게 노력을 합니다. 굉장한 변화를 집어 넣는 거예요. 이번 전시에도 그런 최신의 노력이 들어가 있습니다.” 권대섭 작가는 노트에 또박또박 정자로 쓴 글로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요즘 현대미술의 시작을 1917년 뒤샹의 변기 사건으로 본다. 나는 항아리에서 그 낯설음을 보았고 충격이었다. 1970년대 초, 서구미술 사조를 따르려고 미친 노력들을 했는데 아이러니였다.” 그가 대학 생활을 하던 때는 서구의 미술 사조가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던 때였다. 교수도, 학생들도 앵포르멜((Informalism.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표현주의와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은 추상의 한 갈래.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현대 추상의 경향으로 비정형이란 의미다. 정해진 형상을 부정하고 일그러진 형상과 질감의 효과를 통해 격정적이고 주관적 표현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같은 서구의 미술에서 답을 구하던 시절이었는데 권대섭 작가는 인사동에서 우연히 달항아리를 본 후 거기서 평생을 걸 만 한 ‘미니멀’과 ‘모던’을 본다. “눈물이 다 핑 돌더라고. 완벽한 미니멀이자 낯설음이었어요. 힘도 있고 감동도 있고 신선하기까지. 그건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에 대한 향수기도 해요. 현대미술에는 미래적 미감과 영원성이 있어야 하는데 달항아리에 그게 있어요. 밀도와 긴장감으로 꽉 채워진 아득함.” 그렇다고 그의 관심이 전통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흙과 유약을 포함해 모든 재료와 조건이 바뀐 지금 재현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고 후대에게 다시 미래가 될 ‘짱짱한’ 달항아리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힘과 생명력은 밀도와 연결되어 있고 그 밀도를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가마의 크기를 키우지 않는다는 설명도 있었다. 그의 가마에 들어가는 달항아리는 한번에 4점. 국내외에서 작품 문의가 많은 지금 가마의 크기를 키우라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도 많지만 쓸데 없이 가마가 커지면 그 안에서 나오는 물건도 이내 헐렁해진다고 믿기 때문에 기존의 가마 크기를 고수한다. “스스로 리미트 Limit를 정해 놓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해요. 가마도, 달항아리도 더 크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러면 밀도가 떨어져요. 허술해진다고.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주제를 알고 한계를 알아요(웃음). 도예가 불의 예술이라며 불에 책임 전가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동의 안 해요. 나무 한 개비를 더 넣을까 말까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작가 정신이지 하늘의 요행에 맡기는 게 작가 정신이 아니에요. 최고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흙과 유약은 당연히 최고로만 씁니다. 나무는 한옥이나 사찰의 고건물을 해체할 때 나오는 목재를 갖다 써요. 그런 나무들은 수백 년을 버티면서 완전히 마른 거잖아. 한옥에는 소나무를 많이 썼는데 잘 마른 소나무에 불이 붙으면 화력이 확 올라가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참나무랑은 다르지. 흙은 합천과 진주, 고령과 고성에서 나오는 것을 계속 실험하면서 써요. 저마다 점력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거든. 다 써 보는 거지. 배합도 달리해 보고. 최고의 재료는 기본이라 부연할 게 없어요.”
그의 말들을 떠올리며 전시장에 놓인 달항아리를 본다. 팽팽한 긴장과 아득한 고요가 동시에 담겨 있는 작품. 둥글고 넉넉한 몸체에 담긴 큰 직선도 찾아본다.
글 정성갑 문화예술전문기자 | 전 <공예+디자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