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화랑에서는 2016년 11월 18일부터 2017년 1월 8일까지 파리에 거주하며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배 작가의 개인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숯을 재료로 한 2000년대 초기 회화 중 대표작 10여점과 신작으로 구성되며, 특히 캔버스에 숯이 그대로 드러나는 <Issu du feu> 시리즈와 기하학적 모티브가 두드러지는 <landscape> 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배는 ‘숯’이라는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을 통해 한국 회화를 국제무대에 선보여 온 작가이다. 작년 유럽 최대의 동양예술품 박물관인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단색화’ 전, 2014년 대구미술관과 프랑스 페르네 블랑카 재단 전시에 이은 이번 개인전은 숯이라는 재료를 현대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조형언어를 구축한 이배의 작품 세계를 심도 있게 보여주는 뜻 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파리를 거점으로 20년 넘게 한국과 파리, 뉴욕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배는 1990년 도불 이후 서양 미술재료 대신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재료인 숯을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과거 그의 작품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쏟아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층층히 유화물감을 축적시키는 작업이었는데,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던 당시 작가로서 유화물감과 캔버스등의 과중한 재료비를 감당해낼 길이 없었다. 작가가 목탄으로 이것 저것 드로잉 하는 것에 만족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그의 아틀리에 근처에서 싼값으로 판매하는 숯 포대를 발견한 것이 숯을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숯은 이배에게 자신의 원천을 일깨워주는 재질이였으며, 물질로서의 숯을 지나 회화적 수단인 동시에 그의 회화의 본질이자 귀결점이다.
숯을 사용하기 시작한 초창기 그의 관심은 우선 사람의 인체였다. 메마르고 접착력이 없는 숯으로 화면 위에 인체를 그려내는 것은 수십 번 반복되는 덧칠을 요구하는데, 덧칠 과정에 작가는 숯가루를 접착시키기 위해 송진으로 된 아교나 수용성 미디움을 사용하게 된다. 이 접착용제의 사용이 숯을 부조에 가까운 투박한 마티에르로 만들고, 계속되는 중첩과 범위 확대는 숯이 무엇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화면에 직접적으로 붙게 되어 스스로 의미체가 되는 하나의 오브제가 된다. 하지만 이 숯 조각 하나하나를 붙이는 일은 엄청난 노동과 끈기를 요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 후 연금술과 자연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관심을 확장시켜 나갔고, 유럽화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1995년 이후부터 그의 작품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작가는 지난 십여 년 전부터 최근까지 검정과 크림 빛 흰색의 서체적 추상회화들을 주로 선보여왔다. 2000년대 초 숯이라는 재질에서 벗어날 필요성을 느끼고 검은 숯가루와 숯덩어리를 공중으로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였는데, 그날 이후 아크릴 메디엄과 검은 안료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번 전시는 이 기념적인 퍼포먼스 이전의 작업들과 현재의 작업이 공존하는 자리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절단한 숯 조각을 나란히 놓아 접합한 후 표면을 연마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Issu du feu> 시리즈와 숯가루를 짓이겨 메디엄을 사용해 화면에 두껍게 붙이는 <landscape>는 숯의 본질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다양한 조각적 형태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작품들이다. 회화 <Issu du feu>는 수백 개 숯의 단면이 화면을 가득 매워 각각 다른 빛을 표현하는데 다양한 방향의 각도들의 그 빛은 은근하고 수줍다. 마치 숯 덩어리 묶음 작품을 단면으로 잘라놓은 모습을 띈 것 같기도 한 이 시리즈는 나무 결 같기도, 나무테 같기도 한 세밀하고 섬세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검은 획이 캔버스 안에서 부유하듯 떠 있는 형상의 최근 작업은 메디엄이 섞인 숯가루로 모티브를 그린 후, 일정한 두께의 메디엄을 바르고, 완전히 마르면 모티브를 똑같이 다시 그리는 과정을 세번 반복한다. 그 결과, 공간적 두께와 시간의 지층이 발생하며 그의 회화는 2차원적의 단순한 평면이 아닌 3차원적 실제로써 존재한다.
숯은 상징적 의미가 강할뿐 아니라 고유한 한국문화를 재발견케 하는 재료이며, 그의 작업에서의 숯은 일차적 질료 외에 검정이라는 동양적 감성을 이차적 질료로 아우르고 있다. 또한, 작가는 모든 색을 포용한 검은 색에는 한 가지의 검은 빛깔이 아닌 백 가지의 색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오랜시간 동안 숯을 사용한 독창적인 작업방식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을 이끌어 온 이배 작가의 이번 전시를 통해 전통적인 소재들이 융화된 현대미술의 오늘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