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화랑(해운대)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극사실 회화의 계보를 잇는 강강훈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강강훈의 작업은 대형 캔버스를 채우는 사실적인 인물표현과 정밀한 묘사, 다채로운 색채가 주요한 특징이다. 2019년 이후 조현화랑에서 3년 만에 공개하는 이번 신작에서는 인물이 주가 되었던 전작들과 달리 인물과 사물이 조화를 이루며 확장된 주제의식을 선보인다.
목화와 어머니
목화의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작가는 목화를 보며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목화의 부드러운 솜털이 어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 같았고, 솜을 받치고 있는 쪼글쪼글 갈라진 잎사귀는 갖은 고생을 겪으며 자식을 키워온 어머니의 손을 닮았다. 목화는 꽃이 지고 나서야 열매를 맺고 그 열매의 꼬투리가 터지면서 흰 솜털을 드러낸다. 꽃처럼 아름다운 시기도 잠시, 대부분의 시간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했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부족한 자식으로서 속죄하는 마음과 그리움으로 목화를 그렸다.작가는 2016년부터 작품에 줄곧 딸을 등장시켰는데, 딸아이의 어여쁜 시기를 간직하고 싶은 마음과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소중한 존재의 단면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하였다. 결국 목화로 상징되는 어머니, 그리고 딸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 세대를 아우른 가족의 의미와 작가에게 진정 소중한 존재들을 표현하고 있다. 메인 작품 《해는 진다》를 보면 아이의 머리 위에 목화가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온 빛이 목화와 아이의 머리 윗부분에만 맺혀 있다. 태양 같기만 했던 어머니가 해가 지듯 떠나고 빛은 새로운 세대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소재의 확장과 제작 과정
작품은 목화로만 이루어진 소품과 인물이 함께한 대형 작품으로 구분된다. 대형 작품의 제작 과정을 보면 먼저 딸아이의 다양한 표정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인물과 함께 배치될 목화 다발을 여러 각도로 촬영한다. 수백장의 사진 속에서 A컷을 골라내고 작가의 머릿속에서 화면을 구상한다. 이러한 과정이 에스키스를 대신하는데, 구성이 완료되면 곧바로 캔버스에 스케치를 시작한다. 면밀하게 계산된 화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작가의 감정과 감각이 적극 반영된다. 대형 인물 초상을 그려온 작가에게 특정 사물을 주요하게 다룬 이번 시도는 큰 도전이었다. 목화만을 다룬 소품들은 메인 작품보다 앞서 그려졌는데, 본 전시의 주요 소재로서, 사물과 충분히 교감하고 작가의 마음에 와 닿은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이후 인물과 조화시키는 과정 또한 신중했다. 내용적 중요도와 화면 속 무게감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리얼리티를 넘어서
목화의 표현은 기술적인 극사실주의를 탈피하는 과정과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감각적 구상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이는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목화 특유의 부드러운 솜털은 바람에 날리듯 하늘거리고 중심부는 두꺼운 물감으로 강한 마티에르를 주었다. 메마른 잎사귀 또한 기술적인 묘사를 절제하고 어둠에 숨겨진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다. 감각적 묘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색채’였다. 이전까지의 다채로운 색채는 메시지를 더욱 확고하게 하면서 시각적 유희를 선사함과 동시에 강강훈 작품의 시그니처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번 작업은 목화가 갖는 고유의 색채에만 집중하고 있다. 인물도 땀구멍까지 표현했던 이전과 달리 피부를 매끄럽게 처리했다. 오히려 얼굴에 드리운 어둠 안에서 채도를 세밀하게 조절하여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맞춰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이제 작가에게는 현실(realism)과 닮은 리얼리티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의 리얼리티는 우리의 삶과 작가의 심상을 얼마나 더 와 닿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더욱 과감해진 붓질과 생략을 통해 디테일을 덜어내는 과정, 그리고 내면의 심상을 담아내는 시간 속에서 진정한 리얼리티(reality)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강강훈의 작업은 단지 시각적 유희의 차원을 떠나 인간적인 성숙과 세상의 이치,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그것에 따르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좋은 회화란 무엇인가를 숙고할 수 있도록 한다. 조선 21대 왕 영조는 왕비를 간택할 때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모두들 장미, 모란 같은 꽃을 언급할 때 정순왕후 김씨는 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답하여 왕비로 간택되었다고 전해진다. 강강훈의 작업 또한 정순왕후의 말처럼 화려한 꽃이 아닌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위로하는,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회화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