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작가의 유작전이 연장되어 조현화랑 달맞이와 해운대점에서 8월 31일부터 12월 3일까지 열린다. 1991년 박서보 작가의 첫 개인전으로 인연을 맺고, 이후 총 14번의 전시를 기획해온 조현화랑은 이번 개인전을 통해 아직까지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박서보 작가의 신작 묘법을 선보인다. 박서보의 묘법은 1970년대 초기의 연필 묘법, 1980년대 중기 묘법, 2000년대 이후의 후기 색채 묘법으로 구분된다. 이번 전시는 2020년대를 기점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후기 연필 묘법을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뜻깊은 자리로, 총 12점의 후기 연필묘법이 공개된다. 또한, 올해 제작 및 발표된 디지털로 묘법을 재해석한 비디오 작품이 1000호에 달하는 연보라 묘법 대작과 더불어 몰입감 있는 관객 참여형 설치로 소개된다. 이외에도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세라믹 묘법 6점, 판화 작품 15점을 포함하여 총 35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끊이지 않는 탐구와 실험 정신으로 묘법 시리즈를 지속해온 박서보 작가의 수행의 결과물을 목격하게 한다.
조현화랑 달맞이의 돌계단을 올라 커다란 철문을 열면 평소 전시실과는 사뭇 다른 어두운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넓이 5,50m, 높이 2,50m의 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화면은 박서보 작가의 묘법 중 연보라의 강렬한 색감과 입체감 있는 질감을 초고해상도로 확대하여 움직임을 부여한 디지털 작품이다. 아주 작은 지점에서 시작되어 전체로 확장되면서, 평소 눈으로 관찰할 수 없었던 세밀한 디테일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박서보 작가의 손자 박지환이 제작한 것으로,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하던 작가가 디지털 문명을 대면하며 느낀 공포심에 대한 돌파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색채가 다음 세대를 통해 디지털 화면으로 재해석된 의미가 크다.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연보라의 오묘한 빛을 따라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환영 속을 거니는 끝에, 디지털 작품의 원형이 비좁은 전시실에서 발견된다. 1000호에 달하는 박서보의 연보라 묘법은 2010년에 제작된 것으로, 캔버스 표면에 올려져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내는 과정에서 눌리고 밀리면서 선과 색을 안으로 흡수하는 한지의 물성이 연보라색과 어우러져 비움을 통한 채움의 정신성을 묵묵히 발현한다. 손의 흔적을 덮는 규칙적인 선이 만들어내는 절제에 담긴 색감이 자연의 자기 치유 능력을 발휘하듯 소멸하고 소생하길 반복하며 기운을 흡수하고 또 발산한다.
전시는 화랑 내부의 계단을 통해 2층에서 이어진다. 고요한 푸른 색감으로 칠해진 커다란 전시 공간에는 박서보가 1986년 중단하였다가 최근 작업에 재개한 신작 연필 묘법 12점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밝은 파스텔 톤의 색감 위로 반복과 평행의 리듬감 있는 신체성을 드러내는 연필묘법에 대해 박서보 작가는 “무목적성으로 무한반복하며 나를 비우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캔버스 표면에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연필 묘법은 세살난 아들이 글씨 연습을 하면서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연필로 빗금을 치는 모습을 보고 체념을 떠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손에 한지가 닿을 때 그 방향을 바꿔서 진행하는 과정은, 묘법을 매일같이 그려오며 신체와 같이 익숙해 졌기에 비로소 가능한 작업이다. 자연의 빛을 정신화한 파스텔 톤의 작품엔 알 수 없는 위로와 안정감이 깃든다. 유화물감이 밀리고 한지가 찢기는 물성에 세밀하게 반응하는 거장의 자유로운 손길이 경직된 모든 것을 극복한 온화하고 따스한 파스텔 톤의 색채와 더불어 존재 이전의 무한으로 뻗어나간다. 전쟁을 겪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했던 젊은 시절의 좌절을 돌파해낸 의지로, 불규칙하고 거친 자연에서 광활한 시야로 자정 능력을 길어낸 박서보에게 자연과 화폭은 물리적인 대상인 동시에 은유이다. 오랜 시간의 수련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화폭에 담아 조율하는 박서보의 묘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 없이 변화하며 확장되는 힘을 느끼게 한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신작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후기 연필 묘법 시리즈와 디지털 묘법 등 박서보 작가의 묘법을 다양한 물성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희귀한 기회이다.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디지털 묘법은 전시장에서 뿐만 아니라 프리즈와 키아프 아트 페어 기간을 포함한 약 한달 동안 서울 코엑스 SMTOWN 건물 외벽에 위치한 국내 최대 규모의 커브드 LED 전광판에 송출할 예정으로, 초고화질 화면에서 나오는 묘법 시리즈를 도심 한복판에서 생생하게 만나게 된다. 조현화랑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70여년이 넘게 진행되었던 화업 동안 끊이지 않는 탐구와 실험 정신으로 묘법 시리즈를 지속해 왔던 박서보의 지치지 않는 수행의 결과물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작가소개
박서보 작가는 한국미술의 전위적 흐름을 이끌며 단색화의 기수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1년에 태어난 그의 작품은 광복 이후 탈식민지적 고민과 전후 국가 재건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단색화는 박서보 작가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 화백의 영향을 받은 소수의 회화가들이 당대 화단을 둘러싼 고집스러운 사상에 대한 반발이 일부 작용한 화풍으로, 1970년대 초 한국의 얼과 철학에 대한 작가의 급진적 해석과 서구추상화의 간접 영향으로 탄생해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단색화는 러시아의 구성주의, 그린버그의 환원주의, 유럽의 제로, 일본의 모노하(이우환이 이끌었던 전위 미술)에 이르기까지 세계 주요 회화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지만 비로소 본질적인 표현방식으로 구현된 것은 박서보의 손을 통해서 였다. 일, 가족, 공동체, 국가라는 일상의 의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박서보의 실천은 물감, 기질, 손의 특이성에 바탕한 무한에 대한 명상이다. 겸손을 추구하는 자기 수행을 통해 그의 조형적인 묘법 연작은 글쓰기를 처음 배우는 아들이 시도를 거듭하며 좌절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아버지의 부드러운 시선과 순간에서 비롯되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형태, 즉 경직되고 인위적인 모든 것을 극복한 순수한 표현이다. 작가는 랑앤 파운데이션, 화이트 큐브, 베니스 비엔날레, 삼성미술관 리움, 부산 시립미술관, 리버풀 테이트 갤러리,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등의 다수의 전시에 참여해왔다. 그의 작품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홍콩 M+ 미술관, 아부다비 구겐하임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도쿄 현대미술관과 같은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법(猫法)
묘법(猫法)은 글을 쓰듯 선을 긋는 것을 말한다. 제목은 김환기의 권유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보낸 시간에서 따온 것이다. 묘법(猫法)은 제목 그대로 선을 긋고 얻은 산물이다. 캔버스 위에 도료를 칠하고 아직 마르지 않은 표면에 연필로 선을 긋는다. 그은 선 위에 도료를 칠하여 선을 다시 긋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반복되는 과정과 그 손짓, 몸짓에 작품의 중심이 있다. 1980년대에는 다른 류의 종이 대신 재질이 질기고 내구성이 뛰어나며 표면적 특성이 독특한 한지만 사용하며 결정적인 변화가 일었다. 캔버스 위에 한지를 여러 겹의 한지를 얹고 젤로 접착한 뒤, 마르기 전에 한지 위로 "글쓰기"가 이루어졌으며 율동적인 선형질감을 위해 선을 그은 다음 막대기를 사용하여 캔버스에서 한지를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그의 말대로 세간을 떠난 고요 속에서 '염불을 반복하여 외는 승려'와 같다. 2000년대에 들어 Ecriture 시리즈는 중화된 회색과 흑색에 채도가 높은 단색으로 진화했다. 팔레트의 변화와 함께 표면에 각인된 선의 폭은 더뚜렷해졌고 측면에서 보았을 때 더욱 도드라졌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단색화는 강렬한 순색이었다가 한 걸음 다가오며 발견하는 결과 질의 존재감이 더해진다. 박서보의 묘법 회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동양의 세계관이 담긴다. 브러쉬를 놓으면 그림이 완성된다는 서양의 관념과 대조되는 점이다.